은행나무 부부
은행나무 부부
by 운영자 2019.11.12
- 반칠환 -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 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보지 못 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린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 놓은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 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반칠환 시집 『전쟁광 보호구역』, 《지혜》에서
작품설명
세상에는 꽃도 피지 않고 번식을 하는 것이 있고, 암수의 몸이 날씨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있다고 한다. 자연은 무수한 방법으로 씨앗을 남기는가 하면 씨앗이 아니더라도?번식의 능력을 지닌다. 반칠환 시인은 은행나무가 바람을 매파로 암수의 꽃이 수정이 되는 것을 두고 다양한 시각에서 그 사랑법을 관찰하고 있다. 삼백 년 동안 암수의 은행나무가 각자 떨어져 있어도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리는 것이 모두 깊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 증거로 까치가 지은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고 가을마다 노란 엽서를 수천 통 쓰기 때문이라 여긴다.
이 엽서를 몰래 읽은 감나무가 은행나무의 적나라한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낯 뜨거운 이야기가 많았기에 낯 뜨거운 붉은 홍시를 내비친다고 말한다. 땅 위의 마음이 이러할진대 땅속 엄지발가락 같은 뿌리는 신부의 종아리에 닿아 신부의 몸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가상적이지만 현실에서 있음 직한 사랑이 사람 사이에도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은행나무 부부는 서로 마주 보는 모습으로도 세상의 시련을 함께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사랑이 꼭 발가벗고?정욕을 채워야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