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沙平驛)에서
사평역(沙平驛)에서
by 운영자 2019.11.04
곽 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에서
【임영석 詩人과 교차로에서 쉽게 읽는 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며, 1983년 시집의 표제작ㅇ이기도 하다. 이 시는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사평역을 통해 1980년 광주항쟁의 현대사를 톱밥 난로 속에 톱밥을 태우듯이 뜨겁게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휴머니즘의 감정들을 끝없는 그리움과 낭만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시를 슨 배경과 시를 읽는 독자의 배경은 서로 다르게 배치될 수가 있다. 사평역에서는 시인의 의도된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고 함박눈 내리는 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발길을 무작정 붙잡아 둔 대합실 톱밥 난로처럼 우리들 생의 길을 한 번쯤 묻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차는 약속된 장소에만 갈 수 있다. 때문에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만 남아 있다. 지금은 역 대합실에 톱밥을 지피는 난로가 놓여있지 않지만, 우리들 현대사에 역 대합실은 방황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젊은이에게 끝없이 질주하는 질주본능을 해소하는 그런 여정의 길을 갖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모든 역마다 한 번씩 멈추었다가 출발하는 비둘기호부터, 통일을 염원한 통일호 기차. 지금은 무궁화호만 남아 그 길을 고속 열차와 함께 달리고 있을 뿐이다. 사평역에서는 우리들 삶의 역사를 더디고 느린, 그러나 따뜻한 감성의 마음을 녹여주는 시다. 세상이 설원 속에 잠든 것처럼 깨끗이 변해 있기를 갈망하나 그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고속 열차가 달려도 그 빠른 질주 속에는 과거의 느린, 아픔이 있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사평역은 그런 우리들 아픔의 역 하나 가슴에 그려준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에서
【임영석 詩人과 교차로에서 쉽게 읽는 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며, 1983년 시집의 표제작ㅇ이기도 하다. 이 시는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사평역을 통해 1980년 광주항쟁의 현대사를 톱밥 난로 속에 톱밥을 태우듯이 뜨겁게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휴머니즘의 감정들을 끝없는 그리움과 낭만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시를 슨 배경과 시를 읽는 독자의 배경은 서로 다르게 배치될 수가 있다. 사평역에서는 시인의 의도된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고 함박눈 내리는 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발길을 무작정 붙잡아 둔 대합실 톱밥 난로처럼 우리들 생의 길을 한 번쯤 묻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차는 약속된 장소에만 갈 수 있다. 때문에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만 남아 있다. 지금은 역 대합실에 톱밥을 지피는 난로가 놓여있지 않지만, 우리들 현대사에 역 대합실은 방황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젊은이에게 끝없이 질주하는 질주본능을 해소하는 그런 여정의 길을 갖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모든 역마다 한 번씩 멈추었다가 출발하는 비둘기호부터, 통일을 염원한 통일호 기차. 지금은 무궁화호만 남아 그 길을 고속 열차와 함께 달리고 있을 뿐이다. 사평역에서는 우리들 삶의 역사를 더디고 느린, 그러나 따뜻한 감성의 마음을 녹여주는 시다. 세상이 설원 속에 잠든 것처럼 깨끗이 변해 있기를 갈망하나 그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고속 열차가 달려도 그 빠른 질주 속에는 과거의 느린, 아픔이 있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사평역은 그런 우리들 아픔의 역 하나 가슴에 그려준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