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기(雨期)

우기(雨期)

by 운영자 2019.06.25

- 강계순 -

흠뻑 젖고 난 다음에는
젖는 일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새 한 마리 날으지 않는
캄캄한 하늘
허기진 위장으로 손 뻗고
더듬거리며
어둡고 질척거리는 길 위에
냉수 들이키며 자라는 한 그루
나무가 되는 일.

젖어서 땅 두드리며
깊이 내려서서
풀뿌리 밑 아득한 곳으로 내려서서
작게 작게 숨쉬는 풀벌레같이
가만히 드러눕는 일.

온 몸 단근질하며
깊이 젖는 일 배운다.

흠뻑 젖고 난 다음에는
젖는 일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계순 시집 『빈 꿈 하나』. 《문학예술사, 1984년》에서

작품설명




강계순 시인의 시 「雨期」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궂은일이 생겨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삶의 걸음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한 번 일을 겪으면 그만한 일은 내성이 생겨 스스로 극복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누구나 오늘이라는 시간이 처음 주어져 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오늘은 처음 맞는다. 나이가 어린 아이도 처음 오늘을 똑같이 맞는다. 경험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때가 되면 날이 덥고 춥고 쌀쌀하고 경험했던일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밤이라 해서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우기란 비가 많이 오는 시기를 말한다. 그 비를 피해 갈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인생도 삶의 빗줄기가 내려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 지혜롭게 해쳐가는 방법을 어른들께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흠뻑 젖고 난 다음에는 젖는 일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이 말에 공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슬픔과 아픔의 시간에는 그 슬픔과 아픔 때문에 삶의 뿌리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을 극복한 후에는 그 시간이 자기 자신의 삶에서 우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두려움을 극복하면 그다음부터는 두려움보다는 희망이 다가온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