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길을 지운다
나무들이 길을 지운다
by 운영자 2020.03.13
- 이나명 -
땀을 닦으며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산 벼랑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슬한 벼랑 밑으로 새끼줄 같은 오솔길들이 여럿
갈라져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때 내가 갔던 오솔길은 어디쯤인지
나무들은 두 손 높이 들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치고
발 빠른 계절은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
힘에 부친 내가 큰 곰바위에 등 기대고 쉬는 사이
속이 타는지 산은 마른기침 컹컹대고
나무들은 이미 등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수북수북 내 발등을 덮고 사방 길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오솔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여기저기 지워진 길들이 내 발목을 휘청거리게 했다
나는 그곳에 오르기 위하여 나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무들이 애써 지워놓은 길을, 내가 다시
이나명 시집 『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땀을 닦으며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산 벼랑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슬한 벼랑 밑으로 새끼줄 같은 오솔길들이 여럿
갈라져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때 내가 갔던 오솔길은 어디쯤인지
나무들은 두 손 높이 들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치고
발 빠른 계절은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
힘에 부친 내가 큰 곰바위에 등 기대고 쉬는 사이
속이 타는지 산은 마른기침 컹컹대고
나무들은 이미 등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수북수북 내 발등을 덮고 사방 길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오솔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여기저기 지워진 길들이 내 발목을 휘청거리게 했다
나는 그곳에 오르기 위하여 나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무들이 애써 지워놓은 길을, 내가 다시
이나명 시집 『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작품설명>
내가 사는 곳은 치악산이 버팀목으로 앉아 있다. 겨울철 산불예방을 위해 탐방로를 폐쇄할 때를 제외하고는 틈틈이 오르는 편이다. 이나명 시인의 시 「나무들이 길을 지운다」라는 詩도 산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을 보며 좋아졌다. 산에서 산 아래의 길을 바라보면 내가 올랐던 길들이 멀리 있어 보이지 않고, 나무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다. 세상의 이치가 눈앞에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길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산 너머 마을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고 첩첩 산의 깊이에 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가까이 있으면 책을 펴고 읽는 글처럼 보이다가도 책을 덮으면 보이지 않는 글처럼 느껴진다. 산의 높이라는 것이 그만큼 깊고 높은 마음의 길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나명 시인은 발 빠른 계절이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고 말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길을 바라보는 것이 시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길이 있다. 아무리 높은 산을 오르고 험한 바닷길을 간다고 해서 삶의 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나무들이 길을 지우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도 항상 바라보지 않으면 감추어지고 희미해지는 길이 있다. 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감추어진다. 항상 가까이 두려고 노력할 때만 내 길이 되는 것이다. 삶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지워지지 않게 발길을 자주 드려야 멀어지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은 치악산이 버팀목으로 앉아 있다. 겨울철 산불예방을 위해 탐방로를 폐쇄할 때를 제외하고는 틈틈이 오르는 편이다. 이나명 시인의 시 「나무들이 길을 지운다」라는 詩도 산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을 보며 좋아졌다. 산에서 산 아래의 길을 바라보면 내가 올랐던 길들이 멀리 있어 보이지 않고, 나무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다. 세상의 이치가 눈앞에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길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산 너머 마을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고 첩첩 산의 깊이에 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가까이 있으면 책을 펴고 읽는 글처럼 보이다가도 책을 덮으면 보이지 않는 글처럼 느껴진다. 산의 높이라는 것이 그만큼 깊고 높은 마음의 길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나명 시인은 발 빠른 계절이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고 말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길을 바라보는 것이 시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길이 있다. 아무리 높은 산을 오르고 험한 바닷길을 간다고 해서 삶의 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나무들이 길을 지우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도 항상 바라보지 않으면 감추어지고 희미해지는 길이 있다. 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감추어진다. 항상 가까이 두려고 노력할 때만 내 길이 되는 것이다. 삶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지워지지 않게 발길을 자주 드려야 멀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