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임영석시인과함께쉽게읽는시

담쟁이

담쟁이

by 운영자 2019.11.19



이경임


내겐 허무의 벽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한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 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이경임 시집 『부드러운 감옥』, 《문학과지성사》에서

【임영석 詩人과 교차로에서 쉽게 읽는 시】

이경임 시인의 시 「담쟁이」에는 담쟁이의 질긴 생명력과 여자들의 생활력을 함께 견주어 보며 시를 읽으면 왜 담쟁이가 벽 하나를 감싸 안고 벽을 갉아먹고 사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담쟁이는 벽이 되었건, 바위가 되었건, 나무가 되었건, 나름 제 삶의 햇빛을 받아내기 위해 햇빛을 드는 쪽으로 몸을 뻗어 나간다. 이 척박한 곳을 다른 식물들은 삶의 거처로 삼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황홀함을 혼자 즐기는 광기의 여자로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외로움이나 고독, 향수를 스스로 즐기는 사람에게는 섬이나 바다가 가장 안락한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담쟁이가 잿빛 담장을 녹색의 잎으로 뒤덮고 밖을 내다보게 하는 창으로 인식하게 했다는 것은, 차단된 공간을 담쟁이의 질긴 생명력을 통해 눈길을 한 번 더 잿빛 담장이었던 담쟁이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잿빛 담장을 갉아먹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 그 질긴 생명력이 지독한 사랑 때문이라 여긴다. 우리는 이 세상 삶을 척박하고 외롭고 괴로울수록 사랑의 갈증을 더 느낀다.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사랑도 쉽게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절실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가슴을 그만큼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담쟁이는 그런 척박한 삶의 환경에 질긴 사랑의 끈을 바라보게 하는 시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군 진산에서 태어나 1985년 《현대시조》로 등단 후, 시집 『받아쓰기』외 5권, 시조집 『꽃불』외 2권,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들』을 출간했고, 2012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7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을 받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서 창작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