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落 書

落 書

by 운영자 2019.11.05

- 김어수 -

찢어진 그 세월이
안개처럼 피는 저녁

한결 아쉬움이
餘白에 얼룩지고

다 낡은 조각 종이에
그이 이름 써보다.

말이나 할것처럼
산은 앞에 다가서고

五月 긴 나절에
번저 드는 메아리를

공연히 턱 괴고 앉아
그저기는 내 마음.

그립고 하 허전해
내 그림자 꼬집다가

불현듯 잔디밭에
먼 구름을 흘겨보고

쓰면서 나도 모르는
그 글자를 또 쓰오.

황규동 편저
『한국의 명시 해설』, 《혜원출판사》에서

작품설명
김어수 시인은 강원도 영월 출생이고 한때 승려이기도 하고 교직에 몸담은 시조시인이다. 낙서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삶의 낙서를 의미한다.
아무렇게나 쓰고 쓰지만 그 낙서 속에는 자신도 모른 삶의 갈증들이 숨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낙서는 장난 글씨를 말한다. 심술로 타인을 욕하거나 세상을 풍자할 때 주로 쓰는 글씨다. 요즘은 낙서보다는 인터넷상의 댓글, 또는 벽에 대자보 같은 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낙서는 암울한 시대에 말 못 할 말들을 이름도 밝히지 않고 화장실 벽이나 공공장소의 벽에 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이다.

낙서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낙서라기보다는 우리들 삶의 세월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인생의 낙서로 읽어야 할 것이다.
‘다 낡은 종이에 그이 이름 써’ 보면서 잊힌 사람의 마음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낙서 속에서 발견한다. 그 마음 한복판에는 삶이라는 종이가 놓여 있다. 때문에 쓰면서 나도 모르는 그 글자를 또 쓰고 있다고 말한다. 어제도 우리는 같은 길을 걸으며 살았고 내일도 어제처럼 같은 삶의 길을 걷고 살아가는 그 삶이 우리들 마음의 글씨라 해야 할 것이다. 쓰면서 나도 모른다는 글씨는 바로 우리 삶의 길에 놓인 내 모습이다. 그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낙서는 내내 가슴에 나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는 글씨가 어떻게 써졌는지 바라보는 글씨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