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의 등 - 고영민 -

책의 등 - 고영민 -

by 운영자 2018.12.24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창비, 2009년 발행》에서

작품설명
등이란 동물의 척추 관절이 자리한 곳이다. 그 삶을 지탱하고 꼿꼿한 삶을 살아가는 중대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런 등을 고영민 시인은 책의 등을 통해 바라보며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등의 앞쪽에 책장처럼 많은 날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읽을거리가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등이 그렇고, 어머니의 굽은 등에서 지난 삶의 세월 청춘의 아름다움이 접혔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말한다. 이 세상 삶은 항상 전쟁터 같은 곳이다. 때문에 살면서 등을 보이고 뒤로 물러설 때가 있다. 힘센 자에게 약한 자가 등을 보이는 것은 더 당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숱한 다짐을 하였기 때문에 돌아서서 등을 보이는 것이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자랄 때도 순한 가지를 먼저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 순한 가지가 굵어져 하늘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허공도 처음부터 강하고 뾰족한 나뭇가지를 밀어 올리면 받아주질 않는다. 아무리 한 이불 속에 잠자고 살아가는 부부라도 속옷을 갈아입을 때 돌아서서 입는 것은 부끄러움만큼 많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서서 보여주는 등이 사랑의 낱장을 잘 감싸고 있다는 증거다.